존 칼빈의 제네바 교회법과 오늘의 한국교회

칼빈은 장로교회의 4직제를 통해 성직자 중심의 위계 구조를 타파하고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를 실현하고자 했다

한국교회법연구소 | 기사입력 2026/02/26 [11:04]

존 칼빈의 제네바 교회법과 오늘의 한국교회

칼빈은 장로교회의 4직제를 통해 성직자 중심의 위계 구조를 타파하고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를 실현하고자 했다

한국교회법연구소 | 입력 : 2026/02/26 [11:04]

  © 한국교회법연구소


소재열 박사(한국교회법연구소, 신학박사, 법학박사)

존 칼빈이 16세기 제네바에서 시행한 교회법의 수립 과정과 그 현대적 의의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목사와 평신도 대표인 장로가 협력하는 4직제를 통해 성직자 중심의 위계 구조를 타파하고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를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컨시스토리를 통한 권징은 단순한 처벌을 넘어 공동체의 거룩함을 회복하려는 영적 재활의 목적을 지녔으나, 동시에 시민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비판과 방종파와의 정치적 갈등을 낳기도 했다. 또한 국가와 교회의 영역을 분리하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던 칼빈의 시도는 서구 정치사에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오늘날, 이 역사는 교회 조직이 본래의 가치를 잃고 법을 권력 투쟁의 도구로 악용하는 현상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던진다. 결국 제네바 교회법의 성패는 정교한 시스템 설계보다 이를 운용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지향점과 거룩함에 대한 진실한 열망에 달려 있다.

 

(한국교회법연구소) 16세기 종교개혁은 흔히 오직 믿음, 오직 은혜 등 이런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러한 교리와 신학이 현실 세계에 담아내 구체적인 구조를 갖추지 못하면 결국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칼빈이 16세기 유럽의 거대한 지각 변동 속에서 제네바에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대항하는 교리적 수정을 넘어선 작업이었다. 사람들의 진리 인식과 권력 구조 자체를 완전히 재편하는 혁신적인 작업이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실제적인 현장

 

교리와 신학이 어떻게 눈에 보이는 교회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현대의 교회 조직이론 관점에서도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역사의 이야기는 1541년 스위스의 제네바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당시 제네바는 중세, 근세 유럽의 군주국인 사보이 공국의 지배와 로마 가톨릭 주교의 통치에서 막 벗어난 신생 독립 공화국이었다. 16세기 초, 사보이는 제네바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제네바는 1536년경 사보이와 로마 가톨릭 주교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립 공회국이 되었다. 이후 1541년 존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와 교회 개혁을 본격화하면서, 사보이와 제네바는 정치, 종교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1541년 당시는 엄청난 혼란기였다. 칼빈은 3년 전 스트라스부르로 추방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복귀한 칼빈이 곧바로 제네바 교회법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른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실제 제도로 구현된 첫 단추였다. 칼빈은 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던 스트라스부르에서 마르틴 부처를 만나 교회를 이끄는 4직제인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완성했다.

 

교회의 4직제와 평신도 대표인 장로

 

이 네 가지 직분 중에서 장로라는 직분을 제도화한 점이 특징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는 비가시적인 무형교회만을 강조했지만, 스트라스부르에서 돌아온 후 <기독교강요> 제2판에서는 가시적인 유형교회를 동시에 강조했으며, 그 유형교회의 직분 체계를 정비하였다. 그 직분 체계 중에 목사와 평신도의 대표자를 언급했으며 이를 장로라 하였다.

 

여기 평신도(平信徒) 대표라고 하였을 때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성직(목사·사제 등 공식적인 안수 직분)을 맡지 않은 모든 신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원적으로는 헬라어로 라오스(λα&#972;&#962;)로 “백성, 민중, 공동체”를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백성’, ‘선택받은 공동체’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여기서 영어 laity(평신도)가 파생되었다. 따라서 “평신도”라는 말의 뿌리는 단순히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본래 의미는 ‘낮은 신분의 신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개혁신학에서 평신도는 단순히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아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구성원, 각자 은사에 따라 사명을 감당하는 자이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강조된 만인제사장 사상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으며 영적 책임을 공유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중세의 성직자 중심 구조를 비판하며 나온 중요한 신학적 전환이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Clergy)란 말씀 선포와 성례 집례를 위해 공식적으로 안수받은 직분자라면, 평신도(Laity)는 안수 직분을 받지 않았으나 교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신자이다. 

 

장로교 전통에서는 항존직인 장로·집사도 안수를 받지만, 목사와는 직무 성격이 다르다. 이 때문에 “평신도”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는 교단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평신도는 ‘영적으로 낮은 단계’의 표현은 옳지 않았다. 성경적으로 그런 위계는 존재하지 않다. 직분의 차이는 기능의 차이지, 구원이나 가치의 차이가 아니다. 따라서 장로는 평신도 대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종교개혁의 만인 제사장에 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해이다.

 

평신도 대표가 참여한 교회법 완성

 

당시 평신도 대표가 교회 치리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 구조로 생각하면 엄청난 파급력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 정말 매력적인 지점은 바로 그 권력의 분산 방식이다. 권력의 분산이다. 중세 유럽 천년을 지배했던 것이 어떤 구조였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는 혁신적이었다. 중세는 철저한 위계질서에 기반한 성직자 중심주의였다. 교황부터 시작해서 주교 사제로 이어지는 피라미드의 직제였다. 종교적 권위는 물론이고 사회를 통제하는 의사 결정권의 정점에 소수의 성직자가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데 칼빈은 평신도 대표인 장로들을 세워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교리와 신학에만 멎은 것이 아니라 교회 현실에 그대로 적용했다. 평신 대표가 목사와 함께 교회 치리, 교회 거룩함을 관리하는 핵심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교회가 더 이상 특권층인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가 교회법 아래 질서 있게 조직되고 상호 견제하는 공동체로 변모했음을 의미한다. 지배 계급이 독점하는 밀실에 평범한 교인의 대표들을 합류시킨 셈이다. 신학적인 명분이 사회적 계급 구조 타파로 이어진 구체적인 사례와 같다.

 

어떤 뛰어난 리더라도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면 필연적으로 부패하거나 맹점에 빠지기 마련이다. 견제가 없으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평신도 장로 직제를 통해 성직자의 독주를 견제하고 또 성직자는 말씀으로 교회를 이끄는 아주 상호 보완적인 균형을 구축한 것이다.  

 

권징, 묶고 푸는 치리회의 직무

 

칼빈은 교회법을 통해 제네바에 구축한 교회 조직과 질서의 핵심 엔진은 권징이었다. 이 권징을 실행하기 위해서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컨시스토리, 즉 치리회라는 아주 강력한 기구를 만들었다. 매주 목요일마다 모였던 기구이다. 매주 모여서 제네바 시민들의 신앙과 도덕적 삶을 세밀하게 살폈다. 지금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도덕성 감시라고 하면 어딘가 좀 숨 막히는 감시 사회를 떠올리게 된다. 충분히  타인의 일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컨시스토리가 내렸던 무거운 조치 중 하나인 성찬 참여 제한이었다. 수찬 정지는 단순히 성찬을 나눌 때 참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목적을 들여다보면 다른 개념이다. 교회에서 영구히 배에 배제하고 처벌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기 행동을 돌아보고 다시 건강한 일원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회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회복의 역할이었다. 

 

16세기 당시 사회에서 성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의식 하나 건너뛰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는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적 영적 공동체인 교회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했다. 컨시스토리는 부부싸움, 이웃 간의 심각한 분쟁 고리대금 혹은 공공연한 신성모독 같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일상적인 갈등부터 심각한 범죄까지 다 다루었다. 그런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즉각적으로 ‘끝이다’라는 ‘형벌’을 내리기보다는 여러 차례 권면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냥 처벌하고 끝내는 게 아니었다. 칼빈에게 있어. 이 권징은  단순한 행정처분이 아니었다. 그는 참된 교회를 규정하는 세 가지 표지로 말씀의 바른 선포, 성례의 바른 집례,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징을  꼽았다. 참된 교회를 이루는 세 번째 표지가 바로 권징이었다.

 

교회가 단순히 규칙, 어긴 자를 색출하는 사법기구가 아니라 궤도를 이탈한 구성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돕는 영적 재활센터 같은 역할이었다. 법이라는 차가운 형태 안에 구성원의 영혼을 돌보려는 의도를 담아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칼빈의 의도가 아무리 회복과 치유에 맞춰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교회 현장에 적용될 때 엄청난 딜레마를 낳았다. 

 

‘방종파(리버틴스파)’의 등장

 

컨시스토리가 개인의 일상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결과적으로 제네바 시민들의 개인적 자유를 엄청나게 제약하는 통제 시스템으로 작동했다. 화려한 옷차림을 규제하고 술집 출입 통제하고 심지어 집안 부부싸움까지 72회 소환 대상이 되었다. 현대 관점에서는 명백한 사생활 침해이다. 역사적으로도 제네바의 이런 엄격한 통제에 반발해서 자유를 요구했던 방종파, 즉 리버틴스라고 불렸던 사람들과 극심한 갈등이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도시 제네바에서 장 칼뱅의 개혁에 가장 강하게 맞섰던 집단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리버틴스(Libertines), 한국어로 흔히 “방종파”라 불린 세력이었다. 이들은 과연 도덕적 타락 집단이었을까? 아니면 종교적 통제에 저항한 정치 세력이었을까?

 

‘리버틴스(Libertines)’는 라틴어 리베르타스(libertas, 자유)에서 나온 말로서 직역하면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명칭은 대개 칼빈 측에서 붙인 비판적 호칭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이들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방종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데 신중하다.

 

1530~1550년대의 제네바는 종교개혁과 정치적 독립을 동시에 겪고 있었다. 사보이 공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신생 공화국이었고, 종교적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가던 시기였다. 칼뱅은 1541년 복귀 후 교회법을 정비하고, 콘시스토리(치리회)를 통해 시민들의 신앙과 도덕을 감독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리버틴스와 충돌이 발생한다.

 

통제와 자유

 

리버틴스는 크게 두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 리버틴스이다. 제네바의 전통적 시민 가문 중심으로 교회의 권징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출교권(성찬 제한)을 시의회가 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이들은 교회의 독립적 치리권에 반대했다. 둘째, 급진적·영적 자유주의 그룹이다. 일부는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죄에 매이지 않는다”는 신비주의적 주장이다. 도덕적 규범을 상대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칼뱅은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교회의 거룩성을 해치는 위험한 사상으로 보았다.

 

핵심 쟁점은 출교권이었다. 가장 격렬한 충돌은 “누가 성찬 참여를 제한할 권리가 있는가”였다. 칼뱅은 교회(컨시스토리)의 고유 권한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리버틴스는 시민 정부가 최종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 갈등은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라, 교회와 국가의 권력 경계, 종교적 권위와 시민 자유의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었다.

 

결국, 1555년 제네바 선거에서 칼빈 지지 세력이 승리하면서 리버틴스는 정치적 기반을 상실했다. 이후 칼빈의 교회 체제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리버틴스를 단순히 “도덕적 타락 집단”으로 보는 해석은 오늘날 재검토되고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교회의 과도한 통제를 경계한 시민 자유 옹호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영적 권위를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한 집단이기도 했다. 이 갈등은 16세기 제네바에서 벌어진 자유와 질서의 충돌이었다. 칼빈은 거룩을 지키는 질서를 강조했고, 리버틴스는 시민적 자유를 강조했다.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교회의 규율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자유는 질서 없이 가능한가?

 

교회 질서를 위해 어느 선까지 규율해야 하나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개인의 삶에 촘촘한 도덕성 잣대를 들이대면 권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족쇄가 될 수 있다는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 제네바의 상황을 보면 이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아주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당시 제네바가 처했던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보어야 한다. 

제네바가 이제 갓 독립한 불안정한 국가였고 무엇보다 유럽 전역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수많은 난민이 몰려들고 있었다. 인구가 갑자기 폭증해서 사회적 혼란이 심각했다. 그런 무질서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질서 문란을 제한 없는 자유를 허용한다면, 오히려 교회 전체가 붕괴될 수 있었다. 

 

그래서 칼빈의 교회법이 일종의 안전망 역할을 했다. 폭력이나 방종으로부터 약자들을 보호하고 사회적 결속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울타리였다. 개인의 무절제가 공동체의 거룩함을 해치지 못하게 막아줬다는 의미이다. 개인의 자유 침해라는 비판과 공동체 붕괴를 막기 위한 필수적 안전망이었다.

 

국가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

 

권력과 통제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정치 즉 국가 권력과의 관계이다. 제네바 시회와 교회는 어떤 관계였는가? 칼빈이 제시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 모델은 서양 정치사에 정말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었다. 칼빈의 핵심 원칙은 국가와 교회를 명확히 구별하되 완전히 별개로 분리하지는 않았다. 

 

국가는 시민들의 물리적 평화와 사회 규범을 유지하는 외적 질서를 담당하고 교회는 신앙과 도덕이라는 영적 질서를 담당한다고 규정했다. 각자의 고유한 관할구역을 설정한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당시 중세 시대를 지배했던 것이 교황권 체제였다. 교회가 세속 군주 머리 꼭대기에서 정치권력까지 다 쥐락펴락했던 구조였다. 칼빈은 그것을 거부했다. 동시에 교회가 국가 권력에 완전히 종속되어 세속 정부의 행정부서 중 하나로 전락해 버리는, 이른바 에라스투스주의 모델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교회가 정치에 휘둘리는 것도 반대했다. 그 두 가지 극단을 모두 피하면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았다. 그런데 이 구별의 원칙이 가장 치열하게 충돌했던 지점이 바로 성찬 참여 제한, 즉 출교 권한이었다. 시의회와 치리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세속 권력이 교회를 통제하고 싶어 했다. 반면, 칼빈은 이것은 교회의 고유한 영적 권한이므로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칼빈의 세계관에서는 국가와 교회 모두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 있는 독립된 기관이었다. 서로 고유 영역을 존중하면서 팽팽한 동반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세속 권력이 신앙의 영역을 정치적 무기로 악용하지 못하게 영적 독립성을 사수하려 했다. 정말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교회 권력의 균형과 견제

 

16세기 제네바에서 평신도의 참여를 끌어낸 장로 직제, 처벌을 넘어 회복을 꿈꾸었던 컨시스토리의 권징, 자유와 통제 사이의 아슬아슬한 딜레마, 그리고 국가 권력과 교회의 절묘한 균형 잡기가 이슈였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현실을 향해볼 필요가 있다. 교회 조직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그 초심을 잃었을 때 어떤 기괴한 모습으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교회, 노회, 총회 조직 내에서 법이라는 것이 본래 목적, 즉 공동체를 지키고 상처를 회복시킨다는 목표를 잃어버렸다. 대신 조직 내 주도권을 잡기 위한 파벌 싸움의 무기로 전락해 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생명력 있던 신학적 가치는 증발하고 차가운 형식주의만 남았다. 아주 뻣뻣한 법조문만 남아서 무기가 된 것이다.

 

조직의 리더들이 위기에 처할 때 법의 맹점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반대파를 숙청하거나 시대의 변화를 못 읽고 과거 규정에만 얽매여서 공동체 생명력을 갉아먹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과거 제네바에서는 권징이 조직 정체성의 핵심 기둥이었는데. 오늘날에는 갈등을 피하려고 아예 사라져 버려서 도덕적 해이를 그냥 방관하기도 한다. 아니면 아예 정반대로 가기도 한다. 

 

권위주의적인 리더가 자기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공포 정치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극단적인 현상들도 벌어지고 있다. 치유의 도구가 억압의 무기로 전락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것은 비단 교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노회, 총회, 각종 단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간이 모인 모든 사회 조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병리적 현상임이 틀림없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내는 그 질서와 규칙이라는 것이 단지 기득권 유지를 위한 껍데기인지 아니면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보존하려는 치열한 실천인지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법 자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구현하려는 거룩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칼빈이 세웠던 제네바 교회법의 역사적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법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그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가치와 열망을 담느냐 하는 본질적인 태도의 문제로 귀결된다. 본질을 놓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제네바 교회법은 신학의 현장화

 

존 칼빈이 1541년에 제정한 제네바 교회법은 교회의 단순한 행정 매뉴얼이 아니었다. 교회 내 권력을 분산시킨 장로 제도, 처벌 대신 회복을 지향한 컨시스토리, 그리고 세속 권력과의 독립적인 견제를 통해 신학을 현실 구조 속에 구현해 낸 거대한 실험이었다. 교회의 건강함과 개인의 회복을 바라는 진실한 열망이 살아 숨 쉴 때 비로소 법은 우리를 보호하는 아주 따뜻한 은혜의 울타리로 작동한다. 

 

하지만 그 숭고한 열망이 차갑게 식어버리면 권력욕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순간 아무리 훌륭한 법조문이라도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통제의 족쇄로 전락하고 만다. 16세기 제네바의 이 복잡한 실험은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와 교회 질서 사이의 균형, 권력, 집중 방지 문제는 오늘날 우리 모든 영역에서 구축에 여전히 강력한 거울이 될 수 있다.

 

칼빈의 제네바 교회법은 도덕적 나침반과 거룩을 향한 열망에 그 성패가 완전히 달려 있었다. 사람에게 달려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그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이 어느 날 도덕적 방향성을 완전히 상실했는데 사람의 일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던 그 엄격한 규칙의 구조만큼은 완벽하게 유지되어 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기 두려운 시나리오다. 칼빈이 설계한 이 치밀한 시스템 내에는 인간의 필연적인 부패로부터 조직 자체를 방어할 수 있는 자동 안전장치가 과연 존재했을까? 아니면 얄궂게도 거륙함을 수호하기 위해 만든 그 견고하고 촘촘한 통제망 자체가 타락한 리더십의 손에 쥐어졌을 때는 가장 무자비한 억압의 무기로 돌변해 버리는 치명적인 설계상의 약점을 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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